조직신학

조직신학<속죄론>

목자1 2023. 6. 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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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고전15:3~4).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에 대해 속죄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 부분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돌아가심에 대한 여러 주장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 속죄론, 주관적 속죄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객관적 속죄론의 대표 주창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고자 추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책은 신학적 논쟁이 아니었고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적 작업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적 경건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께 진 무한한 빚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분명 하나님께 진 무한한 빚을 갚을 수 있는 분은 오직 무한한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로 진 빚을 하나님께서 갚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고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려 희생하심으로써 하나님이자 사람인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빚을 갚기 위해 무한하면서도 인간적인 보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죄에 대한 안셀무스의 이론은 흔히 상업적 이론이라고 불려 왔으며 '대리적 속죄'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지급을 대신함으로써 신자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대부분 십자가에서 발생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 희생의 제물입니다.

 

 한편, 피터 아벨라르도 '그리스도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가?'의 문제를 숙고하였습니다. 아벨라르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교훈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압도적 증거를 준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실 필요가 없으셨으며 빚에 대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벨라르의 속죄 이론은 종종 '주관적' 또는 '도덕적' 속죄론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대부분 십자가에서 일어나지만, 예수님의 전 생애와 가르침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은 주로 하나의 모범이나 스승으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시각적 및 감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지곤 합니다.

 

 교회는 수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를 인간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하는 데 있어서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완전한 설명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모범이나 스승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관적 속죄론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객관적 속죄론이 필요하며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 속죄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안셀무스의 만족설을 발전시켜 '형벌대속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이루신 속죄는 객관적이며 대리적이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통해 성취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객관적인 속죄론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제한속죄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속죄에 대해서 '제한 속죄'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돌아가심은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의 돌아가심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한 속죄론을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하면, 예수님의 돌아가심의 효과가 어떤 면에서 무효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은 성경의 권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은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할 만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 따라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람만이 구원받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제한 속죄를 반대하여 보편 속죄를 주장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일부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데 기꺼이 동의 합니다. 이들이 제한 속죄에 대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보편적인 복음의 선포와 관계있습니다. 즉 제한 속죄 교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는 주님의 명령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절대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의 보편적 선포를 반대하는 사람이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진영 안에 있기는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일반적으로 '하이퍼 칼뱅주의자'라 부릅니다. 즉 '극단적 칼뱅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극소수의 사람이 취하는 견해입니다. 칼빈주의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입장으로 흐를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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